"그때는 운동을 하지 않는게 더 수치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거액의 몸값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긴 후 먹튀 논란이 불거져 나왔을 당시를 회고하며 박찬호 선수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팀과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텍사스 유니폼을 입은 박찬호 선수는 부상을 참으며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몸이 제 1의 자산인 프로선수가 부상을 안고 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투지"라는 말로 미화되기 이전에 선수생명이 위협받는 어찌보면 미련하기까지한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 선수의 머리 속에는 잠깐 쉬는 것보다 계속 그라운드에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는 박찬호 선수의 야구를 대하는 기본적인 마인드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예로 보여집니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한 배경에는 박 선수의 순수한 스포츠 정신 외에 그를 등뒤에서 지켜보는 수많은 한국팬들의 눈길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던지는 한 구 한 구에 어려운 여러사정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키우고 있는 조국에 있는 팬들을 위해 몸이 조금 말을 듣지 않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던 박찬호 선수는 스포츠가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의 다른 한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부상 여파로 성적은 바닥을 치고 마음은 황폐해져 갈때 그를 영웅이라 포장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자신을 절벽으로 떠미는 두려운 존재들로 변했습니다.
한국 야구사에 유례가 없었던 수퍼스타가 한 순간에 가장 외로운 인간으로 추락하던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바보" 같은 박찬호 선수는 명상을 통해 또 가족의 힘을 통해 다시 메이저리그 선수로 우뚝 서버립니다.
화면에는 느긋한 얼굴로 지난 날을 회상했지만 그때 그가 감당해야 했던 부담의 무게는 우리의 상상을 휠씬 뛰어 넘고도 남음이 있음을 그의 자그마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 같이 10년 정도 메이저에 있다가 마이너로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냥 은퇴죠"
메이저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박찬호 선수 같은 베테랑이나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순간을 맛보았던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려 놓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했던 선수가 앞날이 약속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모하게도 보이는 또 한번의 도전을 선택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을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팬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또 이렇게 주저 앉지 않고 좀 더 길을 가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박찬호 선수는 주의의 냉담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3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팬들의 커다란 사랑이 오직 자신의 잘남 때문에 얻어지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일부 몰지각한 유명인에게, 그 사랑은 내가 아무것도 아님에도 값없이 받는 소중한 사랑임을 일깨우는 경종이 될 것이고,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암울한 상황이 오직 환경, 배경, 운 없음 때문이라고 한탄하고 있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어둠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공급해주는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그 정도 나이에 그 정도 재력이면 야구 외에 또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박찬호의 선택은 밑바닥부터 다시 공든 탑을 쌓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다가도 어느 순간 한 번쯤 난관을 겪어야 할 현대인에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건히 가다듬을 수 있는 작은 메세지라 하겠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국가대표로 뛰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올 초 박찬호 선수는 국가대표에서 물러나겠다는 자신의 심정을 눈가에 이슬을 보이며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본선 경기에 등장해 누릴 수 있는 것들만 챙길 수도 있었는데 중요도가 떨어지는 예선전에 자신의 휴식시간을 자진반납해가며 선수단을 이끄는 모습을 통해 존경스런 선수의 모습을 보았다는 대표팀 동료의 말이 아니어도 자신의 안위와 명성보다는 조국을 위하는 마음이 더 먼저였던 박찬호 선수의 진심을 우리는 그가 흘리는 눈물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37살, 이제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 하겠다는 마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그가 보였던 태도는 그가 여태까지 태극마크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국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는 요즘 나는 내 조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한번쯤 체크해 볼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박찬호 선수의 메이저리그 데뷔 초기,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노모 히데오와 자신을 비교해 달라는 인터뷰에서 메이저리그 경력이 마무리 되어지는 시기에 기록을 통해 말하겠다던 그의 말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진득하게 목표를 향해 달리던 젊었던 집념의 사나이 박찬호 선수는 중년이 되어서도 그 때의 우직함을 간직한 채 아직도 메이저리그라는 험난한 전쟁터에서 여전히 마운드에 오르고 있습니다.
비록 예전 같이 타자를 윽박지르는 불같은 98마일의 강속구를 뿌리진 못해도, 기간에 맞춰 정기적으로 등판하는 스타 선발투수가 아니어도 그는 아직까지 "순수"라는 이름의 '감동'스런 야구공을 우리의 가슴을 향하여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