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 월드컵 B조 한국과 그리스의 경기는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를 펼친 대한민국이 기분 좋은 2:0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별리그 첫 경기 승리로 승점 3점을 확보한 대한민국은 16강 진출의 유리한 교두보를 만들며 오는 목요일 아리헨티나 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을 기점으로 세계축구변방을 탈피한 태극전사들은 정신력과 기술, 체력, 전술 등 모든 분야에서 높은 레벨에 도달해 있음을 과시하며 힘든 첫 경기가 될 것이라는 당초 예상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깔끔한 승리를 국민들에게 선사했습니다.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사에 이렇게 압도적이고 통쾌하며 그 이상의 득점을 기대했던 경기는 기억에 없을 정도로 훌륭히 진행되었던 경기라 선수들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고맙다는 말까지 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날의 승리는 그라운드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 못지 않게 날씨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커다란 함성과 뜨거운 열정으로 응원했던 대한민국 전체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보기를 염원했던 자신감... 이제는 기본사양으로...
80, 90년대 월드컵에 참가했던 대표선수들은 상대할 팀들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을 뿐더러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커다란 무대에 대한 자신감 부족으로 본기량을 다 펼치지도 못한채 높기만한 세계의 벽을 실감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집에서 TV를 통해 월드컵 선전을 기대하던 국민들은 실점할 때마다 나즈막한 신음을 내뱉으며 항상 4년 후를 기약해야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이후 우리 대표팀에도 "자신감"이란 단어가 경기의 긴장감을 상쇄시킬 정도로 멘탈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6월 12일 남아공에서 그리스와 조별리그 첫 경기를 앞둔 태극전사들은 너무 자만하지도 않고 또 너무 긴장해 있지도 않은 잘 준비된 모습이었습니다. 온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고 메이저 대회란 압박감도 존재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이를 잘 극복해 주었고 그라운드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자신 있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대 네덜란드 전...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주눅들어 있었다는 안타까운 인터뷰는 이제 우리 축구사에서 추억의 이야기거리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는 맨유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캡틴과 프리미어리그 데뷔시즌에 팀 MVP로 선정된 이청용, 프랑스 리그 앙에서 모나코의 왕자로 활약하고 있는 박주영, 전통의 명문 셀틱의 스트라이프 저지를 입고 있는 기성용 등 이제 우리 선수들도 위닝 멘탈러티를 기본사양으로 장착한 팀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를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몰아부치며 승리를 따내던 순간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나려고 했던 이유는 심리적 위축으로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전 대표팀 선수들이 생각나서였을 것입니다.
철저한 준비... 전술의 승리...
첫 승을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스에 대한 사전 준비와 이를 그라운드 안에서의 경기력으로 실현해낸 대표팀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의 부단한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2004년 유럽선수권을 우승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조금 과장해 월드컵 본선보다 더 어렵다는 유럽예선을 통과하며 남아공으로 입성한 그리스를 그렇게 손쉽게 제압해준 대표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경기 양상을 보면 그리스는 주전수비수가 제외되어 있었고 전력의 핵심인 10번 카라구니스가 이전만큼 날카롭지 못했습니다. 또 기존의 막강한 수비력을 자랑했던 3백 대신 4-3-3의 완성되지 않은 전형으로 한국전에 임해 우리를 아주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라는 의심을 사게 했습니다. 그리스의 전력이 예상만큼 강하지는 못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의 경기력이 아주 좋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최대 장점인 셋 피스 상황에서의 헤더를 대비해 장신 골문지기 정성룡이 선발출전했고 미드필드에서 잘 짜여진 압박수비로 상대를 몰아부치며 경기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4번의 평가전을 보면 셋 피스 수비시 각자의 맡은바 역할을 잘 이해하며 좋은 호흡을 보인 것이 관측되었고 마지막 두 경기에선 전력노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가장 중요한 경기를 대비한 것도 어느정도 그리스의 방심을 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쐐기골을 아주 멋지게 작렬시킨 박지성 선수는 이날도 대표팀 전술의 핵으로 염기훈과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그리스를 괴롭혔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질풍같은 드리블로 골을 성공시켰는가 하면 전반전 박주영에게 골키퍼와 1:1로 맞서는 그림같은 쓰루패스를 넣어주며 한국의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염기훈과 이청용도 적극적인 수비가담으로 압박전술의 완성도를 높였고 중앙 미드필더들도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그리스의 숨통을 죄였습니다.
진인사 대천명...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다음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이 말은 6월 12일 대한민국을 온통 환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우리 대표팀을 수식하기에 너무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상대의 최대강점으로 꼽혔던 셋 피스를 막아내고 역으로 프리킥 상황에서 선제골을 만들어낸 장면은 이 경기의 백미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축구강국이다 !!!
27.6 %... 이 수치는 월드컵이 열리기 전 국내외에서 발표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진출 확률이었습니다.
국외 유력한 배팅업체들과 국내 전문가들이 내어놓은 이 숫자는 한국축구가 현재 어떤 평가를 받는지와 세계축구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어준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외신들의 보도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한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다크호스로 지목되었던 것과 그 보도 빈도가 이전보다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젠 거의 모든 해외 축구관계자들도 한국축구의 스피드와 투혼에 대해 인상 깊어하고 있고 어떤 팀을 상대로도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한 수 아래의 레벨이라 치부하는 시선들도 있지만 이번 그리스전을 계기로 그들의 관점도 조금은 달라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선수들과 국민들이 한 뜻으로 이루어가고 있는 대한민국 축구의 우수성을 조금 더 높이려면 몇 가지 개선되어질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이웃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축구 인프라가 엄청나게 넓고 자국리그 육성에도 좀더 진지하며 계획성 있게 여러 일들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인프라는 그렇다치더라도 K리그는 중계에도 애를 먹고 있고 투명한 행정은 먼훗날의 이야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만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휘발성 강한 이벤트에 잠시 울고 웃고마는 서글픈 현실로 축구계 전체가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하는 다음 과제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대처방안이 여기저기서 나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2002년 우리 선수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긴 합숙 기간으로 조직력을 가다듬고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등에 업으며 상대 선수보다 한발짝 더 뛰는 우직함으로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아공에 가 있는 우리 선수들은 경기를 즐길 줄 알며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부분에서도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아직 조별리그 첫 경기가 끝날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그리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축구강국입니다...